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튀르키예 관계 (문단 편집) == 상세 == 튀르키예는 [[6.25 전쟁]]에서 [[유엔군사령부|UN군]] 파병규모 4위로 참전하기도 했다. [[1990년대]]까진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과 [[튀르키예]]가 [[히딩크호/튀르키예전|3·4위전]]에서 만나게 되면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튀르키예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한국측 응원단의 대형 튀르키예 국기 퍼포먼스 이후로 튀르키예가 [[형제의 나라]](Kan-Kardeş ülkesi)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생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 [[1949년]] 합법 정부 승인. [[1957년]] 수교하였다.[* 여담으로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주 튀르키예 한국 대사관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겸임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22694|#]]] 튀르키예인은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부른다. 튀르크는 한자 가차로 쓰면 [[돌궐]]이다. 돌궐은 북주 북제 중국을 속국으로 삼고 오래 군림했으며 돌궐과 [[고구려]]는 동맹을 맺은 역사가 있다.[* 중국 역사서에서 나중에 돌궐이 멸망한 것으로 쓰여 있으나 군사적으로 주군이 사망한 것뿐 사실상 남아있던 돌궐 군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카를루크는 독립적 세력이였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돌궐 제국의 일부 부족이 위구르제국으로 이어지며 당나라는 다시 위구르제국 말발굽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장수왕기에는 몽골-돌궐 연립 정권인 [[유연]]과 동맹이었고 [[지두우]]라는 약소국을 [[반갈죽|분할해 나눠 먹기로 모의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던 7세기경에는 돌궐의 설연타와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동맹을 맺었으며, '''[[주필산 전투|야전병력만 15만 대군]]'''을 일으킬 힘이 있던 고구려와 '''기마궁사 40만 명을 보유했던''' 동돌궐의 연합은 중국에게 최대의 위협이었다.] 또한 고구려는 돌궐의 군사 원조를 많이 받았다. 약 [[냉전|1400년 이후]], 한국과 튀르키예는 중국과 소련을 양 끝에서 포위한 [[제1세계]]의 군사적 요충지로, [[제2차 냉전]]에 이르러선 다시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는 잠재적인 동맹국 같은 관계로 다시 만났기에 참 특별한 인연이다. 튀르키예 분위기가 역사나 민족의 뿌리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기에 카자흐스탄 알마티 쿠르간묘와 [[몽골]]의 유적지 발굴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